펀글

김기선

현진호 2005. 12. 31. 00:36


"외국에선 총장이 물러나면 수위도 하고 정원사도 하는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울대 총장이 수위하면 보증 잘못 섰나, 증권을 잘못했나 뭐 이런 생각부터 합니다. 과거에 뭐 했는지 생각 안하고 그런 걸 다 버리고 나니까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더라구요."

서울대 총장이 수위하면 빚보증 잘못 섰거나 증권 실패?

금융계 CEO에서 택시기사로 직업을 바꿔 화제를 낳았던 김기선(62)씨가 CBS TV <정범구의 시사토크 누군가?!>에 출연해 택시기사로 지낸 4년간의 택시인생을 소개했다.

김기선 씨는 39년간 금융계에 몸담았고, IMF 시절에도 끄덕 않고 CEO를 3번이나 연임하는 등 소위 '잘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임기를 1년 앞두고 돌연 사퇴를 한다. 바로 20년 전부터 계획했던 ‘택시기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택시를 택한 첫째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사도 50세가 넘으면 손 떨려서 수술도 못하고, 자영업도 실질적으로 영업이 잘 안되거든요. 자기가 움직이면서 하는 건 택시가 가장 오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택시는 단순노동이기 때문에 지구력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황우석? 너무 허탈해서 그런지 말하기 싫어해

한 평 정도의 택시 안에만 앉아 있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은 천리 길을 앞선다. 그의 택시는 ‘달리는 국민 여론실’이라고 불릴 만큼 세상 얘기로 가득하다. 최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사태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황우석 박사나 정치 얘기는 잘 안하려고 합니다. 너무 속상하고 허탈해서 그런지 기피하려고 해요. 그런 얘기보다 요즘은 먹고 사는 얘기를 더 많이 해요. 신문엔 항상 좋아진다고 하지만 실질경제에서는 여전히 먹고 사는 게 어려우신 분들이 많아요."

택시비 모자라는 승객 늘어나

그는 택시 타는 손님은 늘어났는데 오히려 수입은 줄었다고 한다. 장거리 손님은 줄고 단거리 손님만 늘었기 때문이다. 특히 택시비가 충분치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요즘 경기를 체감한다고 한다.

"아가씨가 탔는데 1만 3천원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가자, 설마 내가 중간에 내려놓고 가겠냐 하면서 가다보니 2만원이 넘게 나왔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나와서 돈을 가지고 나온다며 집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안 나오길래 ‘또 속았구나’ 생각하고 가려고 하는데 아가씨가 양쪽 두 주먹을 쥐고 나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저금통 깨서 동전 세느라고 시간이 걸린 거예요. 받긴 받았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걸 보면서 이렇게 양심적인 사람도 많구나 느꼈죠. 사실 그런 사람이 99%예요."

승용차 뒷자리보다 앞자리가 좋은 이유

금융계 40년 경험보다 택시 4년 한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하는 김 씨. 택시를 하면서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 때가 가끔 생각도 나죠. 하지만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대부분 머리 젖히고 고민에 쌓여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 앉아 있으면 운전만 잘하면 됩니다. 노동을 해보니까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훨씬 마음도 가볍고 그 쾌감은 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그러면서도 택시기사는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 든’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젊은 사람들이 택시 하는 건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화려한 것도 아니거든요. 수입 내 지출이 가능한 사람들은 가능하지만, 애들 과외 시켜야 하고 레저도 즐겨야 하는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꾸 과속하게 되고 사고가 나는 겁니다. 외국의 택시기사들 보면 백발의 노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초보 택시기사의 좌충우돌 생생 경험담...나이 들수록 ‘거지’같이 살아야

영업용 택시기사로 첫 발을 내딛던 날의 기억은 특별하다. 첫 손님부터 실수 연발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용산에서 손님이 탔는데 가다보니 미터기를 안 누른 거예요. 또 어딜 가자고 했는데 분명히 아는 길인데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갈팡질팡 하며 손님한테 물어가며 겨우 갔습니다. 그렇게 손님이 내려주고 또 가는데 이번엔 손님들이 차를 안 세우는 겁니다. 내 차만 피하나 싶어서 보니 ‘빈 차’표시등을 안 켠 겁니다. 하하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노년에만 집착하는 이들에게 김 씨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노후대책에 대해 대부분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인생’에 대한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우리가 삶의 질을 높이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먹으면 누구든지 좀 품위 있고 고상하고 편안하고 남 보기에도 근사한 일자리에서 폼 내고 싶어 하는데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나이 먹을수록 거지 같이 살자.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거나 잘 입고. 남 의식하지 않고 쉽게 아무거나 자신이 편한대로 살면 그렇게 세상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CBS편성제작부 최영준 기자 yjchoi@cbs.co.kr